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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 하늘샘 " 님 시리즈 : 하르파조 (휴거)

danieell 2015. 11. 7. 12:38

 

 

 

 

 

하르파조 (휴거)

 

 


‘휴거’ 라고 알려진 ‘하르파조’ 는 과연 무엇일까요?
‘하르파조’ 란 ‘크로노스’ 의 ‘첫 사람’ 이 ‘카이로스’ 의 ‘둘째 사람’ 으로 이끌려 올림을 받는
그 '영적인 초월성' 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약속 안에 있게 되는 것을 바울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십 사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고후 12:10)        
여기서 셋째 하늘 (세 번째 성전 = 세 번째 집 = 율법과 함께 자기 열심으로 집을 지어보려고 했던
강도 만난 자를 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이웃인 그리스도의 집, 그 집) 으로 “이끌려 갔다” 고 합니다.        

여기 ‘이끌리다 (하르파조/강제로 ~하게 하다)’ 는 내 뜻과는 상관없는,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끌어올림을 (‘휴거’ 라고들 말하는) ‘하르파조’ 라고 합니다.
그것은 ‘은혜’ 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율법적 옛 체계, 옛 사람, 옛 자아로부터 끌어올려져 은혜와 약속 안에서
예수 안에 이루어졌던 그리스도의 실상이 내 안에도 이루어지게 되는 일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카이로스의 영적 실존으로 이끌려 올림 받는 영적 내면의 부활을 알지 못한 채,
종말에 휴거될 것으로 믿는 미혹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하르파조’ 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기록된바,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하르파조메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4-17) 하였습니다.

영과 생명의 눈으로 이 말씀을 잘 음미해 보십시다.
‘하르파조메다’ 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카이로스’ 에 일어나는 ‘부활’ 과
‘그리스도 임재 (강림)’ 의 실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 말씀하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 11:25) 하셨습니다.
마지막에 부활 될 것을 말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는 ‘오늘의 부활’ 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부활은 크로노스의 어느 때에 죽은 육신의 몸뚱이가
종말이라 일컫는 훗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죽어도’ 가 아니고, ‘죽으면, 죽어야’ 입니다) 살겠고” 하신 그 말씀은
‘오늘의 죽음과 오늘의 부활’ 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오늘’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그와 함께 죽는 그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육체가 죽는 죽임이기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그 죽음을 죽으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와 함께 죽는 그 죽음에 대하여 기록된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 하였습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받는 그 죽음은 육체의 죽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부활이 오는 그 죽음은 육체에 속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정과 욕심의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부활을 맞이합니다.
이 죽음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일어나는 새로운 죽음입니다.

온 세상은 정과 욕심을 살리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정과 욕심을 죽이면 인생은 끝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죽음을 통해서 오늘의 부활에 이릅니다.
즉, ‘크로노스’ 의 ‘생존함’ 에서 ‘카이로스’ 의 ‘생명’ 으로 유월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의 육체는 살았으되, 육신의 생각과 정과 욕심에서 스스로 죽는 것은
매우 특별한 죽음입니다. 이는 오늘의 부활을 믿는 자만이 맛보는 오늘의 죽음입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선포하신 오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육신의 생각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받을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인생 모두는 육신의 생각과 정과 욕심을 살리려고 종교를 가지며, 도덕을 행하며,
수행에 정진하며, 인생이 귀하게 여기는 그 무엇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죽어야 할 것을 다른 형태로 살리려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좇아 육신의 생각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에게만
새 생명의 부활을 베푸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부활은 땅에 떨어진 밀알이 죽고 다시 사는 것과 같아서, 죽을 것이 죽고 살 것이 사는 일입니다.

한 알의 밀은 죽을 것 (씨젖과 껍질) 과 살 것 (씨눈) 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살 것이 죽을 것에게 둘러싸여 있는 동안은, 생명은 보존되어 있으나 싹을 틔울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속사람도 죽는 것으로 둘러싸여 있는 동안은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자기 믿음’ 을 죽이는 일입니다.
‘자기 믿음’ 이 죽어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믿음’ 이 살아납니다.
자기 믿음은 죽을 것을 살리려 하지만, 그리스도의 믿음은 죽을 것을 죽이고 살 것을 살립니다.
자기 믿음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 ‘부활’ 입니다.

누구든지 처음으로 예수를 믿는 자는 죽을 것이 죽고 살 것이 사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알지 못합니다.
정과 욕심을 좇아서 죽을 것을 살리려는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지속되면 ‘짐승의 형상’ 을 이루고 맙니다.
그런즉 그 안에 그리스도의 믿음이 계시될 때 속히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가 그 계시를 좇아 자기 믿음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부활할 때를 일컬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죽으면) 산다‘ 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믿음에서 죽고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부활하는 것이 오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강림 (임재)’ 이란,
우리에게 ‘세상 임금’ 으로 왔던
‘그 예수’ (육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자신의 욕망을 투사해 열심으로 섬기던 내 밖의 예수) 가 죽고,
우리와 하나 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세상 임금이 떠나가면 우리에게서 짐승의 형상도 떠나갑니다.
(여자가 남자 아이 [그리스도, 진리, 씨] 를 낳으면 용도 없어집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에게서 짐승의 형상이 떠나가지 않으면,
비록 죽었던 몸이 부활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짐승일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 ‘짐승의 부활’ 을 고대하는 형편에 처해있는지요.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으니, 그리스도의 형상을 심었으면 신령한 몸으로,
짐승의 형상을 심었으면 짐승의 몸으로 거두게 됩니다.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두려는 것이 오늘날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종교인들의 편리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종말’ 이라고 알고 있는 ‘에스카토스’ 는 ‘종말’ 이 아닙니다.
‘나중, 곧 카이로스의 때’ 를 말하는 것입니다.
‘카이로스’ 란 ‘오늘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실존의 시간’ 입니다.
그런즉 ‘나중’ 을 ‘종말’ 로 아는 것 자체가 그에게 부활이 없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인자 (진리의 말씀을 가진 사람)’ 에게는 ‘나중’ 은 있으나 ‘종말’ 은 없고,
‘짐승’ 에게는 ‘종말’ 은 있으나 ‘나중’ 은 없습니다.
‘나중’ 이란 ‘크로노스의 처음 사람의 생존의 때’ 가 지나간 ‘둘째 사람의 생명의 때’ 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록된바,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이 오늘 이루어진 부활은 영원합니다.

이제 ‘끌어올림 (하르파게스메다)’ 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기록된바,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하였습니다.
오늘 여기서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한 실존은
비록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그 영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저희를 오늘 부활한 자에게로 데리고 오십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내 안에, 나는 저희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생명의 실상입니다.

부활의 실존은 이와 같이 육신의 존재여부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카이로스’ 의 실존으로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우리와 함께 있으며,
이것이 오늘 부활한 자에게 일어나는 하나 됨의 실존이고 그리스도 강림의 실상입니다.
기록된바, “우리에게 구름과 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히 12:1) 하였습니다.
구름이란 첫 사람이 나중 되고, 나중 사람이 처음이 된 수 많은 부활의 증인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부활한 자가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진다’ 하는 말씀은
영 안에서 생명 안에서 읽으면 아주 선명한 ‘징조’ 이지만,
육신과 생존의 눈으로 읽으면 심판의 ‘테라타 (기사)’ 가 되고 맙니다.

부활의 실존은 육신의 생각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이므로,
선악을 극복한 초월의 영적 생명입니다.
그런즉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간다’ 는 것은 강력한 은혜로 끌어올려지는
‘영적 초월성’ 을 일컫는 것입니다. 비록 그 육신은 땅에 거할지라도,
독수리가 하늘을 날듯이 그 영은 마음 하늘의 창공에서 자유롭게 날며 주를 면대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예수께서 구름 가운데 승천하시면서 너희가 본 그대로 오리라 하지 않았느냐’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징조’ 와 ‘실상’ 을 분별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 은 모두 ‘징조 (세메이온)’ 이며, 예수가 구름타고 승천하신 그것도 ‘징조’ 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 실상을 보고 듣고 깨닫게 하기 위하여 징조와 비유가 베풀어져 있습니다.
즉, 우리의 부활의 실존은 예수께서 구름타고 승천하시는 것처럼
선악을 극복한 초월적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초월적 자유의 형상을 이룬 영이 된다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사자가 희생하는 송아지가 되며, 자유의 독수리가 섬김의 인자가 되듯이
하나님의 마음이 그 안에서 영육 간에 거리낌이 없이 역동하는 영광의 형상입니다.

 

 

 

  

     ----    다음은 지상재림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의 실상에 대한 " 하늘샘" 님의 글을 이어서 올리겠습니다.

            

 

                                                                                                                                            다니엘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