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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베덴보리의 사상

danieell 2017. 3. 28. 15:33
스베덴보리의 사상

<옮김>

* 보리의 신학사상

지금까지는 형이상학적으로 하나님이 게시는 것을 알았지 그렇게 친히 나타나 보이신 일은 없었다. 땅 위에 있는 많은 성도가 뵈옵고 싶어도 뵈옵지 못한 주 여호와 하나님을 그는 친히 뵈올 수 있었던 것이다. 땅 위에 있는 만백성들이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한 그의 음성을 보그는 친히 들었던 것이다. 그는 주께서 친히 자기에게 나타나 명령하신 것을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었다. 그는 또 하나 깜짝 놀란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천국과 영인들의 세계와 지옥을 보고 또 그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볼 때 땅 위의 시공 안의 생활은 저 영원한 생에 비하여 그림자요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보였다. 그것은 참이고 이것은 그림자였고 그것은 영원하고 이것은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땅 위에 살면서 동시에 영계에 가 본 사람이 없는 그곳을 그는 이 세상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보고 듣고 영계가 있는 것을 그만은 확인하였던 것이다. 오직 말로 할 수 없는 영원한 세게의 실존을 그는 보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놀라운 것이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 지상의 모든 아름답다고 하는 표준은 바뀌어 가장 추한 것이 되고 이 지상의 모든 선하다는 표준은 저 세상에서는 가장 악한 것이 되고 이 세상에서 진리라 하는 모든 것은 변하여 저 세상에서는 가장 악독한 허위가 되어 있었다. 이 세상 표준과 저 세상 표준은 너무나 거리가 있었다.

이 세상만 알고 저 세상을 몰라보는 무지, 자아만 알고 만유의 주 우리 아버지를 몰라보는 무지, 한 아버지를 모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자매라고 서로 사랑해야 할 기독교 안에서 가장 악독하게 형제를 저주하고 미워하는데서 오는 영원한 저주, 저 눈부신 예복을 입고 교권의 홀을 휘두른 그 관을 쓴 사람이 저 가장 원치 않은 곳에 있는 비참, 성자가 위선자가 되어 있으며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되어 있는 이 바뀌어진 현상을 이것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이 계시의 내용은 보그의 개인적 사색의 산물이 아니요 어떠한 상상의 부수적인 것도 아니다. 온 인류를 위해서 보여 주신 주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1. 신관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바람같은 존재가 아니시고 오직 참사람이셨다. 주 여호와는 우리 인간에 있어서 영체와 같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의 몸과 같아서 여호와 하나님과 주 예수는 일체시요 성신은 영과 육이 하나가 되어 움직일 때 힘이 나와 제 3자에 어떠한 영향력을 주는 것과 같이 주님의 영과 육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천사들과 인간과 만물에게 주는 영향력이었다. 이리하여 주님은 완전히 삼위일체가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재림을 기다릴 필요가 없고 다만 인간의 영적 눈이 떠저서 주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알고 믿게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또 하나님을 막연하게 계시다고만 알고 어떻게 생겼으며 누구와 같으심을 모르고 있다. 사실은 하나님이야말로 사람 모양으로 생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 모양으로 생기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도 머리에 속한 것, 뇌, 눈, 코, 귀, 입이 있으며 가슴과 사지를 다 가지고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바로 신성이 되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주께서 인성을 신성으로 성화하신 것은 무엇으로 아는가? 가나 혼인 집에서 자기 어머니를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인이여 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여인의 아들이 아니었고 주 여호와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변화산상에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앞에서 온 몸을 변화하신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주께서 이 세상에서 입운 몸을 완전히 성화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께서 무덤에 장사된지 사흘만에 무덤으로 가보니 거기에는 주님의 주검은 간데 없고 천사만 있었다. 이거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주께서 육을 입으신 그 몸 전체를 주 여호와께서 쓰시기에 합당하게 성화하사 이 세상에서는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승천하신 것을 뜻한다. 그 옆에 앉았던 천사가 주님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주님의 인성이 바로 신성임을 알지 못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알 길이 없고 구원도 없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 주여 오서 오시옵소서 라고 조르기만 하면 기독교는 무엇이 될까.

2. 말씀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진리이다. 말씀은 보편적으로는 신구약 성경이요 좁게는 10계명, 더 좁게는 2대 계명, 그리고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이다. 이 십계명은 거룩 자체요 능력 자체이다. 십계명은 그냥 받을 수 없는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 친히 시내산에 천사들과 함께 불 가운데 나타나사 울리는 음성으로 이 율법을 선포하셨다. 백성들은 이것을 보고 듣기 위하여 모두 사흘을 준비하였으며 너무 가까이 나아가 혹 죽을까 두려워 산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산에는 울타리를 막았으며 설교자도 장로도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고 모세만 가까이 나가게 하였으며 하나님은 친히 손가락으로 두 돌판에 쓰셨다.

또 모세가 두번 째 산에서 돌판을 가지고 내려올 때는 그 얼굴이 빛났고 이 돌판은 거룩하기 때문에 궤 속에 안치하였으며 성소 가운데서 가장 깊은 지성소에 두었다. 궤는 금띠로 두르고 그 앞에는 금 촛대와 향피우는 금제단을 마련하였으며 그 단은 금으로 칠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말씀이 얼마나 거룩한가를 상징한다. 또 말씀이 권능이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그 말씀 가운데 주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이며 구약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궤를 들고 가면 요단강 물도 둘로 갈라져 길을 열어주고 궤를 들고 일곱번 돌면 난공불락의 성도 무너졌다.

말씀에는 영적인 뜻과 천적인 뜻이 있는데 이들을 알아야 얼마나 말씀이 거룩하지를 알 수 있고 성경의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 곧 성경 중 우리가 사용하는 66권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아니다. 곧 모세5경,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미가, 나훔,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신약의 4복음서 및 계시록만이 하나님 말씀이고 서신서들은 순수 기독교를 설명해 주며 증거하는 것으로 그들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말이요 주가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또 그 낱말 하나 하나에 다 영적, 천적 의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 믿음
현대교회는 주님의 피 공로를 믿는 것을 그 신앙의 내용으로 한다. 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모든 인간의 죄를 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그는 그 피가 인간의 죄를 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피는 다만 주의 신적 진리를 뜻하는 것으로 피로 상징된 주님의 진리가 그릇된 죄악과 사상을 마치 물로 오물을 깨끗이 씻어내듯 하는 것을 상징할 뿐이다. 주의 피요 믿음의 내용은 주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주의 진리가 모든 악과 허위를 씻어내듯 제거하고 정화한다는 것이다.

영원에 들어가는 생활은 순간 순간의 생활 안에 이미 모든 것이 다 들어잇어야 한다. 순간 순간의 사랑 안에 기름이 있어야 그것이 훗날 영원의 세계에 들어가는 기틀이 될 수 있다. 이는 신앙 생활의 순간은 영원과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순간 없는 영원이 있을 수 없고 영원과 결부되어 있지 않은 순간도 없기 때문이다. 순간 안에 사랑이 없으면 신랑이 와도 따라갈 수 없다.

*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은 인간 생활이 그대로 영원히 연속하는 곳이다. 처음부터 천국이 있던 것이 아니고 선한 사람들이 사후에 가서 만든 곳이 천국이고 지옥도 악한 자들이 사후에 만든 것이다. 땅 위의 선과 악의 영원한 연속이 천국이요 지옥인 것이다.

* 최후심판
최후심판과 주의 재림과 새교회의 건설은 연속으로 일어난다. 어느 하나가 비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교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최후심판으로 제거되어야 주께서 다시 오시고 말씀의 속뜻이 밝혀져야 주께서 내실있게 오실 수 있고 새교회가 세워져야 보여주신 진리 안에서 당신을 모시고 사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회를 예로들어 그 순서를 보면 최후심판 곧 악과 거짓을 제거하는 것이 주의 재림에 앞서는 것이다. 예수의 초림 이후 교회의 악과 거짓이란 바벨탑과 용이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주의 권세를 차지하고 또 성경을 인간고유의 총명으로 해석하며 나아가 일반인은 읽지도 못하게 권세를 펴는 것으로 이는 카톨릭의 바벨탑이요 괴이한 신관과 교리는 개신교의 용이다. 그래서 주의 재림에 앞서 바벨탑과 용이 제거되는 것이 최후심판인 것이다.

실은 이것이 1757년에 영계에서 이미 완수되었고 땅 위에서는 지금도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다. 즉 땅 위에서는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정도만큼 보편적 또는 개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 위에서 바벨탑과 용의 신조를 제거하고 주의 새 진리인 말씀의 속뜻을 받지 않아 새 교회에 속하지 않으면 이전 교회의 상태 그대로 존속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땅 위에는 네번의 심판이 있었다. 노아의 홍수 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던 때(왕상 12; 28),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때, 그리고 1757년이다. 이 마지막 최후심판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는 보통 기독교 이외의 사람들이나 지옥에 갈 자들에게 최후심판이 부어질 것이라고 알고 있으나 실은 정통이라는 기독교의 교리교조가 그 심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최후심판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바벨탑과 용을 모시고 사는 영계에서 일어난다. 이들은 참기독교도가 아니면서도 참기독교도인양 허세를 부리며 살기에 이러한 자들에게 심판이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최후심판으로 주님이 오신이래 악과 비진리 속에 살던 자칭 기독교도들로 구성되던 처음 하늘(그들 나름대로의 천국)이라 불리우던 것은 사라지고 새 하늘 곧 초림이후 선과 진리 속에서 살던 자들의 천국이 건설되는 것이다. 이 최후심판은 1757년 영인의 세계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지금도 땅 위에서 현재, 개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 현재는 목적적으로는 심정상태를 뜻하고 시한적으로는 과거도 현재도 다 내포되어 있는 현재를 뜻한다. 예를 들면 마 25: 1-13에 열처녀 비유가 나온다. 여기서 열 처녀는 모든 교회나 성도이고 등은 사람의 육신을, 그릇은 사람 속에 있는 신앙을, 기름은 신앙 속에 있는 사랑을 뜻한다. 즉 사람에게는 신앙이 있어야 하고 그 신앙에는 사랑이 담겨있어야 함을 나타낸다. 교회 안에는 사랑이 신앙 안에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는데 기름을 가진 처녀는 사랑이 있는 사람을, 기름을 가지지 않은 처녀는 사랑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천국 생활은 천년 후 혹은 사람의 사망 후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시작하는 것이요 현재 안에 시작되어야 한다.

이 사랑이 신앙 안에 있으면 어제도, 내일도 아니고 어제와 내일이 다 들어있는 현재 안에 천국 생활은 이미 시작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땅 위의 최후심판은 현재에 일어나는 것으로 목적적으로는 사랑이라는 심정상태에, 시한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포함되어 있는 현재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등의 그릇 안에 기름이 담겨 있는 그것이 신랑을 영접하는 생활이요 언제나 주님과 규원으로 통하는 현재인 것이다. 이 현재를 깨닫고 지금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비록 몸은 땅 위에 있으나 새 하늘 에서도 동시에 사는 사람이요 이 현재가 없으면 그는 이미 심판을 받고 원치 않는 곳에 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또 최후심판은 한 집안 식구 또는 한 교회가 둘로 갈라지는 것을 뜻한다. 같은 교회, 같은 교리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는 구원을 얻고 다른 하나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침대)에 누워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메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 17: 34-35. 밤은 말세를 뜻한다. 두 남자 중 하나는 진리를, 다른 하나는 거짓을 뜻한다. 한 자리(침대)는 같은 교리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누워있다는 것은 그 교리에 의존하여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즉 그것으로 먹고 살고 구원을 얻는다고 자위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렇게 같은 교리, 같은 교회 안에 있을지라도 하나는 진리와 선 안에 있었고 하나는 거짓과 악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는 데려감을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는 것이다. 두 여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뜻한다. 메를 가는 것은 가르치는 것을 뜻하는데 메를 갈면 알곡의 껍질은 벗겨지고 가루만 나와서 가루로 사람은 먹을 것을 취하듯 교회는 양들을 진리로 가르쳐서 사람으로 하여금 남의 씀씀이가 되게 한다. 이같이 같은 교회, 같은 계열의 학교에 있으면서도 하나는 진리를 올바로 가르치고 하나는 그릇되게 가르치게 되어 그 중 하나는 데려감을, 또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는 것이다.

* 주의 재림
초림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으나 재림은 말씀이 속뜻으로 오신다. 속뜻으로 오신다는 말씀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이다. 즉 주께서 부활하신 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눈이 가리워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주님은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고 깨닫게 하심으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하셨다. 이어 그들의 강권에 따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떡을 나누어 주실 때 그때 저희의 눈이 밝아져 그분이 바로 주님이신 것을 알아 보았다.

이처럼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주님을 몰라본다. 이럴 때 주님은 친히 성경을 말씀하시고 풀어 주심으로 우리 마음을 뜨겁게도 하시고 당신이 가까이 계신 것을 보고 느끼게 하신다. 바로 이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재림이요 속뜻으로 오신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을 보는 사람은 성경에서 그 말씀을 풀이해주고 그 안에 계시는 주님을 뜨겁게 보게되는 것이다.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능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에서 구름을 타고는 말씀의 겉뜻이 담고있는 속뜻으로 가르치심을 나타내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은 속뜻에 있는 사랑과 지혜 곧 선과 진리로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의 양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속뜻에서 사랑과 지혜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 새교회의 건설
주 나신 뒤부터 주만을 천상천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또 그의 인성이 곧 그의 신성임을 믿고 아울러 모든 악을 죄로 알고 끊은 사람들로서 앞서간 기독교인들은 1757년을 시점으로 이미 하늘에서는 새 하늘을 이룩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대로 사는 사람들은 땅 위에서 새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 엿새 동안의 천지 창조

첫째상태 : 사람이 거듭나는 첫째 상태는 진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라고 표현되었다. 이 빛의 내용은 하나님이 계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는 땅 위에 오신 바로 그분이시며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진리가 바로 빛인 것이다.

둘째상태 : 무엇이 진리와 선이며 무엇이 거짓과 악이고 진리와 선은 하나님께 속하며 거짓과 악은 인간에게 속한 것임을 구별할 줄 아는 상태이다. 이것이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나뉘어지라는 뜻이다.

셋째상태 : 인간의 기억 속에 각종 진리를 받아들여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상태이다. 이것이 뭍이 드러나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맺는 과목을 내라 하신 상태이다.

넷째상태 : 큰 빛으로 낮을 주관하시고 작은 빛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는 상태는 진리라 불리는 많은 것들 중에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만이 해와 같이 크고 주님을 향한 믿음만이 달과 같이 빛남을 알며 사랑과 믿음이 있을 때 진리가 별과 같이 빛남을 아는 상태이다.

다섯째상태 : 사람이 기억 속에만 진리를 담아두지 아니하고 진리에 대한 감동과 사랑에 대한 애정을 품는 단계의 상태이다. 거울 같은 호수 수면을 뚫고 하늘 공기를 마시려는 고기 같이 인간이 하늘을 호흡하려 하고 새가 창공을 날듯 지성으로 천국을 날아보고 노래하는 새같이 하늘 나라를 읊어보고 양과 같이 자기의 털도 가죽도 살도 젖도 주는 희생적 생활을 하는 상태이다.

여섯째상태 : 신앙이 우선이요 그 다음으로 사랑의 삶을 사는 상태이다. 다섯째 단계까지의 신앙생활은 선을 행하면서도 자아로 하고 사랑으로 하지 않는 동물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삶이었으나 이 단계에서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주님과 이웃을 위한 신앙으로 그 다음에는 신앙에서 비롯된 사랑으로 행하게 된다. 사람 모양 전체가 하나님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코로 숨을 쉰다고 다 사람이 아니요, 입과 귀가 있다고 다 사람이 아니요 신앙 그리고 사랑의 사람으로 살 때 비로소 사람이고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일곱째상태 : 사람이 중생의 단계별로 오르기까지는 걱정과 근심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저녁이 되며’로 표현되었으나 내적으로 완전히 사랑의 삶이 되면 이제는 저녁이 그치고 걱정과 근심이 없으며 시험과 투쟁도 없고 따라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평강이 주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양으로 표현된 상태인 것이다. 또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를 사랑의 사람을 만드시기 위하여 걱정 근심을 하시지만 완전한 사랑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끝내시고 쉬시는데 이를 안식이라 하셨다. 이 안식일의 상태는 이제 시험과 투쟁이 끝나고 심령이 잔잔한 호수 같이 평온을 유지하고 다시는 악과 허위로 자기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또 안식일은 홀로 사는 사람이다. 즉 돕는 배필을 필요로 하지 않고 주님만으로, 사랑만으로 사는 사람이다. 또 안식일은 코에 김을 넣은 사람 곧 사랑으로 호흡하는 사람이다. 또 안식일은 에덴동산이다. 안식일에 속한 사람은 그 속에 없는 것이 없다. 생명나무를 비롯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고 강들도 있다. 생명나무는 주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고 이 지각이 나무처럼 틀어박혀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그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일 주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면 언제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신임을 아는 인식이다. 그가 악을 행치 아니함은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그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선악을 아는 나무로 표현되었다. 에덴동산에는 거기서 발원하는 네 개의 강이 있는데 이 강들은 초목에 꽃을 피우고 알곡을 여물게 한다. 이같이 안식일에 속한 사람은 온 세상에 흩어져 주의 사랑과 진리로 세상을 환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사람이 이렇게 사랑의 삶 속에서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그렇게 되기까지 인도하신 주님 때문이다.

주의 초림 이후 지금까지 천상천하의 하나님을 모시고 그 인성과 말씀이 거룩한 것을 믿고 계명대로 살아온 성도들이 수다하여 1757년 영인의 세계에서 최후심판이 일어날 때에 새로 지으신 새 하늘을 구성한 중심 인물들은 다 개신교 출신이요 그 중에서도 중심을 이룬 사람들은 영국 런던 사람이요 그 밖의 사람은 그 가장자리를, 그리고 개신교 주위에는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보그는 전한다.

* 삼일 하나님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한 기독교 설교자였다. 그는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다음에 가며 신성이 아니요 피조물이라 하고 예수 곧 하나님의 아들은 출생하기 전에는 있지도 않았고 그는 무에서 났으며 하나님과는 다른 실체 또는 본질이라 하였다. 이로인해 주후 325년 니케아에서 콘스탄틴 황제는 종교회의를 열어 아리우스를 피문하였다.

그러나 그를 이단이라 규정한 신조 안에 더 모순된 교리인 삼신론이 나타났다. 즉 ‘보편적 신앙은 이것이니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삼위 안에서 삼위를 일체 안에서 예배한다. 아버지이신 인격이 따로 있고 아들이신 인격이 따로 있으며 성신이신 인격이 따로 있다. 세분 다 무한하시고 세분이 다 하나님이시다. 그렇다고 세 분 하나님들이 아니요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 신조의 제정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을 영원 전부터 계시는 것으로 하기는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세 분이나 계시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는 세 분 하나님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으므로 세 분이 아니고 한 분이라고 못박았으나 결국 말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세 분 하나님을 섬기는 꼴이 되었다. 교회가 이러한 신관 속에 있는 한에는 주님은 재림할 수 없기에 먼저 심판이 었었던 것이다. 이는 또한 개별적으로 교회 안에 이러한 신관을 가진 사람에게 주님이 재림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올바른 고백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예수 그리스도가 곧 저 영원 전부터 계셨던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고 그리스도 안의 영은 성부로 영원 전에 계셨던 여호와시요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인성이요 영과 몸 그 둘이 하나가 되어 인간과 만물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성신인 것이다. 이것이 교정되지 않으면 기독교의 몇 가지 핵이 묵살되는 과오를 저지르게 된다. (보그가 그토록 삼신론을 강조하는 것은 이것으로 주님의 인성이 곧 신성임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기에 그러한 것 같다.)

첫째, 유일신을 불신하게 된다. 만세 전에 계셨던 여호와는 주께 있어서는 우리로 말하면 영혼과 같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인성으로서 우리로 말하면 몸과 같다. 주 여호와는 영원 전부터 당신 자체 안에 가능성으로만 계셨던 인성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으니 그가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의 잉태는 성령으로 되었으나 그의 인성은 마리아를 거친 인성이었던 것이다. 마리아를 거친 인성에는 우리와 같은 실제적 죄는 하나도 없었으나 우리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죄의 가능성은 다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주님은 여기에 인간의 모든 죄를 불러들여 시험을 거쳐 싸우시고 하나에서 열까지 그 인성을 극복하사 신성으로 성화하셨으니 이것이 곧 그분의 영광으로 이를 인간식으로 말하자면 재생과 중생과정인 셈이다.

이것을 성경은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 13 : 3 라고 하였다. 주께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신 것은 인성을 성화하사 신성으로 화하시고 신성으로 화하신 인성을 만세 전에 계셨던 여호와이신 신성 자체와 하나되게 하셨던 것이다. 둘째, 주의 인성이 신성이심을 불신하고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것은 기도의 대상을 잃게 된다. 지금까지 많은 성도들은 아버지께 기도하고 주께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께서 인성을 성화하사 신성 자체와 하나되게 하시고 여호와이신 신성 자체는 당신의 신적 인성 안에 계신 다음부터는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곳에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안에만 게시며 당신의 사랑과 지혜 등은 신적 인성에서만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 내 이름은 주의 신적 인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관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인성이신 주님 안에 계시고 주님의 영광 이전의 영원하신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이 직접 나아가도 모시어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 : 6 라고 하셨다. 셋째, 진심으로 주의 신적 인성을 믿지 못하면 주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게 된다. 다시말해 주의 신성이 담겨있는 이 진리들을 사람의 것으로 알고 주의 거룩한 진리로 받지 아니하면서 그 진리에 대하여 침뱉고 주먹질하면 그 옛날 가야바가 주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것과 똑같은 죄과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 이신득의
개신교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바울의 말을 잘못 해석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롬 3: 28,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 14-16 여기서 바울이 의도한 것은 훗날 많은 신학자들이 이 율법을 십계명 또는 더 넓은 의미의 오경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과는 달리 제사드릴 때의 의식행위인 규례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율법이 계명을 뜻하는 바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울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라고 함으로 여기서는 율법이 계명을 뜻하고 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다는 것은 나아가 주님의 피공로를 죄인에게 돌리시는 전가까지 이르러 사람의 사랑의 행위 없이 하나님의 긍휼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로 발전한다.

* 예수 그리스도
예날 아주 옛날 태고교회의 성도들은 무한하고 영원하신 분을 여호와로 모셨다. 그러나 그들도 무한 그대로의, 영원 그대로의 여호와는 모시지 못하였다. 당신은 너무나 거룩하고 인간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요 당신은 무한하시나 인간은 유한하여 유한은 유한을 다 합해도 무한 앞에서는 무와 같아서 무한을 있는 그대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은 천국을 거쳐 인간에게 이르시는 신성으로는 당신을 그 안에 무한이 내재해 있는 하나의 거룩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 그분을 모시는 그들의 신관, 그분을 믿는 그들의 신앙은 그것으로 족하고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노아 이후 타락으로 사람들은 이전의 신관을 유지할 수 없었기로 이 상황을 아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맞는 신관을 열어 넣어 주셨으니 그 보살핌이 곧 무한 자체를 그대로 주실 수 없었기 때문에 무한이 그 안에 내재해 있는 나타남을 구상하사 처음에는 여자의 후손으로 나실 것을 예고하셨고 그후 이새의 줄기에서 나실 것을,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실 것을 말씀하셨고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에는 역사적, 구체적으로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셨던 것이다. 즉 있음 자체가 나타남 자체로 오신 것이다. 무한하신 여호와는 무한 그대로 오실 수 없고 시공안에 있는 인간이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오신 것이니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안에 무한하신 여호와가 내태한 나타남 자체이신 것이다.

말씀에서는 나타남 자체이신 주를 세가지로 말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신적 인성으로서의 주요 인자는 말씀으로서의 주이고 마리아의 아들은 우리 인간과 하나도 다름이 없는 인간성으로서의 주를 뜻한다. 신적 인성이라는 의미는 나타남 자체이신 주는 우리 인간과 하나도 다름이 없이 아셨으나 그 부성은 어디까지나 있음 자체이시며 또한 신성 자체이신 여호와이신 것과 동시에 마리아에게서 유전적으로 옷입으신 모든 인간적인 것 곧 악과 거짓을 완전히 무로 돌리사 그 어떠한 것도 남지 않도록 제거하셨다는 말이요 또한 주는 그 몸과 살과 뼈까지도 성화하사 인간적인 것은 하나도 없게 하여 신성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신 것을 뜻하며 이제는 신성이 인성 안에 인성이 신성 안에 있는 것을 뜻하기에 부성의 신성 자체와 하나되사 그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는 주를 뜻한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사 우리와 더불어 삼십여년을 사셨으나 우리처럼 마리아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인 것도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지은 죄는 하나도 없으셨다. 그러나 인간성을 띠운 나약한 인간성에는 늘 시험이 그늘같이 따랐으며 멸시와 곤욕을 치르시기까지 거역과 배신을 당하셨다. 주님은 그럴 때마다 마리아의 아들로서는 우리 인간과 같은 역정이 일어나셨고 어느 때는 분노를 느끼실 정도였으나 그 모두를 하나씩 무에로 돌리시고 겸손히 그리고 담담하게 오직 신성 자체의 하회를 기다렸던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게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 아버지는 신성 자체이신 여호와를 뜻하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는 마리아에게서 유전적으로 입으신 인간적인 것 곧 자아와 세욕 또는 악과 거짓을 하나도 없는 데까지 공백상태에 이르게 하신 것을 뜻하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는 그렇게까지 성화하신 인성을 신성 자체가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곧 신성 자체와 하나되게 하옵시라는 뜻인 것이다. 주님은 그만큼 그 인간성을 아무 것도 없는 빈 상태로 만드셔서 그 인성까지도 신성이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비워드렸던 것이다.

“제 9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이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여호와께서 주를 쓸모없다고 내던지신 것을 뜻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입으신 인간성을 하나도 돌보지 않은 듯 주께서 직접 느낄 정도로 무에로 돌리고 빈 상태로 만드사 신성 자체가 마음대로 쓰시도록 모두를 받친 것을 뜻한다. 주는 이만큼 그 인간성을 없는데까지 이끄시고 성화하사 신성과 하나되게 꾀하셨던 것이다. 신적 인성은 아버지와 아들이 온전히 하나되신 주를 뜻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주님은 무덤에 주검하나 그러므로 살, 뼈, 몸의 어떠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다 살으신 것이요 주님은 이 일을 하셨던 것이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주는 이만큼 그 몸까지도 부활하신 신적 인성이 되셨던 깃이다. 살과 뼈가 있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직도 주께서 얼마나 참기힘든 시유(주님의 시험)를 겪으셨고 그러나 그것을 얼마나 거룩하게 곧 영광스럽게 하셨는가를 모른다. 시유를 거쳐서 이기신 것, 그것이 신적 인성의 바탕이 된 것이다.

시유란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성이 감수해야 하는 멸시, 거역, 배신 그리고 인내를 뜻하고 자신과 세욕을 빈 상태로 만들어 이웃과 주를 위하는데 이르는 승리와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으나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음이니라”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은 마리아에게서 받은 자아를 겸손히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데까지 돌린 것을 뜻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한 것이란 말은 그들에 대한 사랑으로 구원을 꾀하신 당신의 성화에 의한 승리와 영광을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적 중생으로 신약에서의 주의 시유와 승리에 대한 것은 광야에서의 사십일간의 시유, 게세마네 동산에서의 피땀흘리신 기도,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고통이 그것이다.

허나 주는 승리 후에 저들을 이ㅟ해 기도하셨으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학, 신관 및 신앙은 앞으로는 주의 이 영광스럽게 하신 신적 인성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시유를 겪고 참고 견디시고 자기를 죽여 철두철미 무에 돌리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신성 자체가 인성에 완전히 하나되어 내재케한 신적 인성의 주를 알아야만 한다. 이 인성이 신성과 결합하는 주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자.

사랑이 크면 시유도 크다. 시유가 크면 영광도 크다. 주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려 하신다. 허나 마리아에게서 얻은 인성으로는 정욕이 앞선다. 천국과 교회를 위하려 애를 쓸수록 세상과 물욕이 앞선다. 이때 나로 죽고 주님으로 산다. 정욕도, 물욕도 죽어야 한다. 그래야 담담해지고 비어진다. 비로소 이웃이 보이고 하늘이 보인다. 위하여 빌게 되고 이때 님만이 내 안에서 왕노릇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영광이요 주는 그 영광의 구주이신 것이다.

주께서 자신의 인성을 극복하고 영광의 상태를 얻어야 했던 이유를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시험들을 이기고 승리할 바로 그때에야 확연히 알게 된다. 이것이 성서가 표현하는 주님의 영광이다.(주님의 승리로 지옥이 극복되고 천계의 질서가 바로잡혀 이제 우리도 승리할 수 있도록 길을 여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그 사랑과 그 지혜는 우리가 속에 있는 지옥을 정복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그 참맛이 알려진다.) 주님의 인성은 마치 우리 육체가 영혼의 지시에 따르듯 아버지인 신성을 높이고 모신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를 높이시고 스스로 행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신다고 하셨다. 이는 자신은 몸이요 아버지는 자기의 영혼인 까닭이다. 주님은 자신을 알파요 오메가라 하신다. 이는 신적 인성의 본질은 사랑과 지혜이며 신적 인성은 그 본질의 형태요 그림자라는 말이다. 이 세상 모든 창조물은 주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목적) 그 지혜로부터(원인) 만들어졌다.(결과) 세상의 모든 일과 사물은 목적과 원인과 결과가 있는데 목적은 원인 안에 그리고 목적과 원인은 결과 안에 있게 된다. 모든 창조물은 목적과 원인인 사랑과 지혜로부터 나왔기에 주님을 알파요 오메가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는 처음에는 그 목적 안에 계시는 사람이었으나 결과에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결과에도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만을 지니고 계셨다. 그러나 세상에 오셔서 인성을 입으시고 난 다음부터는 결과 안에도 계시는 사람이셨다. 그래서 주를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참사람이시고 우리는 그의 형상과 모양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만이 참 생명이시요 우리는 그 생명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만이 사랑이시요 우리는 다 그 사랑을 받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의 신적 인성 안에는 이 세 가지가 다 들어 있다. 즉 영혼 곧 신성으로는 사랑과 지혜요 사람 곧 인성으로는 그 사랑과 지혜의 그림자요 탈인 것이다. 그가 세상의 창조주라면 세상은 당연히 주의 사랑과 지혜로 지어졌다. 이 사랑과 지혜가 하나가 되면 그것은 생명으로 나타나는데 알파와 오메가는 주님의 사랑을 말하고 시작과 끝은 그분의 지혜를 말하며 생명에 속한 것은 처음과 나중으로 불리운다. 다른 말로 하면 영원부터서는 창조주요 시간 안에서는 구주요 영원까지는 속죄주라는 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주님의 부활과 승천의 뜻은 신성 자체가 내재한 주께서 마리아에게서 받은 육신의 뼈와 살까지 성화하사 무덤에 그 주검의 조각하나 남기지 않고 다 성화하신, 신적 인성으로 영화하신 것을 말한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전에 계신 분은 여호와를 뜻하고 이제도 계신 분은 시간 안에 오신 구주를 뜻하며 장차 오실 이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재림주를 뜻하는 것이다. 본래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의 문자적인 뜻 안에는 주의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가 있으며 다시 그 안에는 주님이 계시는 것이다.

이 문자적인 뜻인 구름은 실상을 가리키고 있는 가상이요 목적과 원인을 안고 있는 결과요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육체요 사랑을 가리고 있는 자아요 지혜를 가리고 있는 세욕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출 19: 9 빽빽한 구름은 말씀의 문자의이고 그 가운데 모세가 가리키는 율법서 곧 십계명으로 임하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 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 24 : 15-18 육일동안은 사람이 거듭나는 기간이요 칠일은 안식일 또는 천상의 사람이 되는 것이니 주님은 늘 말씀의 문자의 속뜻 안에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며 더욱 천상의 사람이 되기를 고대하시는 것이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ㄴ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계 14 : 14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이 앉은 것은 주님이 영원히 성경 말씀 안에 영적이고 천적인 뜻으로 계시는 것을 말한다.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다” 삼하 23 : 4 말씀의 문자의가 걷히면 주님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아침의 돋는 빛같다는 말씀이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의 구름을 타시고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신 33 : 26 하늘의 구름은 하늘에 있는 말씀을 뜻한다. 말씀은 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도 있다.

이 세상의 말씀은 자연적이나 천국의 말씀은 영적, 천적이니 천국에서 쓰는 말씀을 가르치면 주의 참모습은 더욱 찬란하게 나타날 것이다.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도다” 삿 5: 4 비가 내리듯 말씀의 속뜻을 잘 가르침 받으면 인간의 지각이 뜨인다는 것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같고 가을 더위에 이슬을 내리는 구름 같도다” 사 18 : 4 말씀을 통하여 사랑과 진리를 부으심을 말한다. “예수께서 무링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눅 12 : 54 서쪽에서 일어나는 구름을 본다는 것은 교회가 황폐한 말세에 말씀의 속뜻을 가르침이 있으리라는 것이고 이에따라 참진리가 풍성하게 교회에 내리리라는 뜻이다.

“그 앞의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시 18 : 12 말씀의 영적, 천적인 뜻으로 인하여 문자의의 불분명한 뜻들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구름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사 68 : 4 말세를 만난 교회를 위하여 말씀의 속뜻을 가르치실 때 마음을 열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사람을 보겠는가 하신 말씀대로 재림주는 사람들에게 거부될 것이다.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사 5 : 6 말세에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풀이해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할 것을 말한다.

* 주께서 구름 속에서 말씀하시고 구름을 타고 다니시는 이유
그 이유는 신성이 모독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고 또 사람이 죽지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람의 영이 육화하여 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만일 덜된 사람이 말씀의 문자의만을 참진리로 알고 접하면 오히려 그 말씀을 따르지 않고 모독하게 된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것이다. 또 신성은 너무 거룩하고 받을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춘 사람이 아니면 사람이 신성에 접하는 것은 죽음 외에 따를 것이 없게 된다. 즉 사람들이 죽지 않고 상처도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구름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느니라.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 33 : 20-23 주는 말씀의 문자의 안에 계시기에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만을 본다 하셨다.

* 인자는 말씀이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계 1 : 12-17은 인자 곧 말씀으로서의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몸을 돌이켜 보았다. 그 이유는 그는 지금까지 주님이 계시는 곳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글을 읽으려면 지금까지의 신관이나 성서관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일곱 금촛대 사이에 계셨다는 것은 새 교회 안에 계신 주님을 뜻한다. 발에 끌리는 옷은 정면으로 진리를 바라보지 못하고 파생적인 진리를 보고 있는 상태이고 가슴은 이웃 사랑을 띠는 결합을 뜻하므로 주님은 만인을 사랑하시는 진리 곧 말씀으로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펼치고 계신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들은 영적 천사들이 보는 모습이지만 흰 머리와 털, 불꽃같은 눈을 보는 자들은 천적 천사들이다. 머리는 사랑과 지혜의 처음 곧 모든 근원이며 시발이 되는 것들이 그 안에 있음이요 털은 그 끝 곧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삼층천 천사들은 주의 가장 근본적인 사랑과 지혜까지 보았던 것이다. 풀무에 단련한 다리는 주의 뜨거운 사랑과 선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적인 것들이고 물소리 같은 음성은 말씀의 자연적 진리를 말하므로 이는 제일 천국의 천사들이 본 주님의 모습이다. 끝으로 삼층천 천국의 천사들조차 주님의 신성 자체를 감당할 수 없어 주님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지 못하고 해가 힘있게 비추이는 것처럼 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재림주의 최고의 모습이다. 이 모든 주님의 모습을 요한이 보았는데 요한은 성만찬을 거행할 때 주의 가슴에 기댄 사람이다. 주의 가슴은 전 인류를 향한 사랑과 자비와 선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근거하는 사람은 다 요한이 되는 것이다.

또 이 요한은 주의 말씀에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하신 바로 그 사람이다. 즉 말세에 사랑 가운데 남아 있는 사람이다. 요한 즉 그 사랑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머무르고 있다면 그런 자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 요한은 또 어머니를 모신 사람이다. 어머니는 남편을 모시고 애정의 딸과 진리의 아들들을 가르치고 먹여 살린다. 그같이 교회는 남편이신 주님을 모시고 신앙과 사랑으로 자녀들을 양육하고 가르치는 모체 곧 어머니이다. 이것이 요한이 받은 계시이다.
출처 : 스베덴보리를좋아하는사람들
글쓴이 : 엄기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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